할아버지를 떠나보내며..
누구나 인간은 저 멀리 인생을 두고 떠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왜인지 모르게 떠나보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다.
아이를 몸에 풀어낸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장례식에는 갈 수 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병색은 꽤 오랜시간이 지났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도 전이니 거의 7~8년 전이다.
그당시의 할아버지의 정신은 온전하셔서 병문안을 가면 곧잘 알아보시고는
죽음을 미리 점치시곤 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가 고령의 나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서도
눈물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지리한 병마와의 싸움이 길어지기 시작했을때, 코로나 감염병이 심해지면서 면회조차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모습을 조그마한 휴대폰 화면으로 밖에 볼 수 없게된
시간이 꽤나 길어지게 되면서 마음은 덤덤해져갔다.
그래도 나를 알아보시고 안부를 물으시고는 했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손녀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는게
느껴졌다. 과거로 자꾸만 돌아가시는 듯 했다.
처음에는 회사 잘 다니냐고, 그 다음에는 학교 잘 다니냐고.
뒤로 가는 기억속에서 아마도 손녀의 존재를 잊으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할아버지의 모습을 뵈었을때는 겨우 면회가 회복되던 1월의 어느날.
만삭이 되어서 할아버지를 보기까지에는 몇년의 시간이 걸린 뒤다.
할아버지를 뵈어야겠다는 생각에 일정을 미루지 않고 어느 월요일에 면회를 하게 되었다.
몇년만에 뵈온 할아버지는 마르셨고 아주 하얀 까까머리를 하고 계셨다.
나를 잘 기억하지 못하시는 듯 했다. 고향집이 생각이 나시는지 가고 싶다고도 하셨다.
할머니의 손을 이끌고 할아버지 손에 쥐어드렸다.
여전히 할머니에게 항상 미안하다고 하시는 말씀. 뭐가 그렇게 미안하셨을까.
부부지간의 일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다.
이상하게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좋았고 컨디션도 좋아보였지만 눈물이 났는데
다행인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눈물이 태가 나지 않았다.
아마도 임신중의 격한 감정이 더해져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더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언젠가 할 이별이라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나서 이틀뒤에 할아버지의 상태는 위중해지셨고, 다시는 그날 면회날과 같은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이 생전 마지막 의식이 있던 상태였다.
큰 병원으로 이송되셨고, 그 뒤로 약 한달간 요양병원을 두번이나 옮기셨다.
중환자실에서 뵌 할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의식이 없으셨고, 중환자실 안은 환자와 면회객들로
시장 바닥 처럼 어수선했기에 제대로된 인사를 드릴 수 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수년간 계시던 요양병원에서 할아버지 생전 짐들을 가져왔다.
그 짐들을 정리했는데 물티슈, 손싸개, 목도리, 컵, 대야와 같은 것들이었다.
쓰시던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버릴것과 남길 것을 구분하는데 몹시 눈물이 났다.
입으시던 내의를 보니 이별이 실감이 났다.
어릴적 생각해보니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볼에 뽀뽀를 해드렸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옛날 할아버지가 손녀를 예뻐해주시기란 곧이 곧 대로 당연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받았던 사랑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왜 몰랐을까
육아로 메말라진 감정에 제대로된 애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니
눈물 뿐이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오는 공평된 일이지만 나에게만은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란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리 될 확률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환상과 같은 바램이었다.
아마도 부인되시는 할머니는 어쩌면 나는 잠깐 했을 바램을 할머니는 한편으로 바라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빨리 할아버지가 가셔야지하는 생각을 하시는 듯 했지만
어쩌면 한번은 다시 건강해지셔서 집으로 오시길 바란적도 있으시지 않을까
찾아가뵙지 못하는 손녀의 불효를 탓하시고, 세월은 야속하다지만 한번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에요, 다시금 정정하시던 모습이 보고싶어요.